2011년 3월 19일 토요일

18. 국내 최초의 Tc-99m MAG3 영상

MAG3에 패배를 한 뒤 내 실력이 킬레이트화학 분야에서 아직 국제 수준에 많이 미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패배는 당연한 일이다. 아직 석사밖에 안 된 학생이 세계적인 학자들과 겨루겠다는 것부터가 무모한 일이었다. 또한 문헌 조사만 잘 했더라도 MAG3에 대한 정보를 더 빨리 알 수가 있었고 따라서 헛수고를 줄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기화학 교과서도 사고 테크네슘에 관한 각종 문헌을 찾아서 더욱 더 열심히 공부를 하여 실력을 쌓아 나갔다.

그리고 MAG3를 직접 합성하여 보기로 하였다. MAG3의 화학구조는 볼수록 배울 것이 많았다. 특히 벤조산을 활성이 강하고 불안정한 티올기에 붙여서 보호해 두었다가 테크네슘-99m을 표지할 때 끓여서 떨어지게 한 점과 타타르산 염을 첨가하여 테크네슘-99m으로 표지시에 콜로이드와 같은 부산물이 생성되지 않도록 한 점 등은 처음 보는 기법이었다.

당시에는 연구비가 적어서 실험을 망치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쓰고 실험을 할 수 있을까를 항상 생각하여야 했다. 합성을 한 단계 한 단계 해 나가면서 성공을 할 때마다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이러한 실험은 유기합성 전문가에게는 별것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새롭고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당시 실험실은 화학실험시 나오는 유독가스를 배출하는 퓸후드의 팬 기능이 약하고 외부에서 역풍이 불면 실험실로 도로 들어오는 수가 있어서 실험실 내에는 내가 하는 실험 때문에 악취가 풍기곤 하였다.

MAG3 직접 합성하여 주사 맞고 찍은 사진
내가 합성한 MAG3에 테크네슘-99m을 표지하였더니 아주 잘 되는 것을 알았다. 당시 동물에서 체내 약물동태 연구에 전문가이던 박경호 박사(현 서울대학병원 약무과장)의 도움을 받아 쥐에 투여하는 실험을 하여 보니 역시 세뇨관으로 배설이 아주 잘 되었다. 나에게는 유기합성보다는 동물실험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섬세한 기술과 인내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존스홉킨스 의대의 헨리 와그너 교수가 폐 영상용 방사성의약품인 Tc-99m-MAA를 자기 자신에게 최초로 투여하고 핵의학 영상을 얻었던 것처럼, 내가 만든 MAG3를 테크네슘-99m으로 표지하고 나에게 투여하고 영상을 만들어 보았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신장으로 매우 빨리 배설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세뇨관 배설을 억제하는 프로베네시드를 먹고 Tc-99m-MAG3를 투여하니 배설이 느려지는 것도 관찰할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당시까지 MAG3를 수입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MAG3 영상이었던 셈이다.

MAG3는 미국에서 이미 개발한 방사성의약품이므로 이를 그대로 합성하여 영상을 만들어 본다는 것은 학문적으로나 기술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진 기술을 그대로 따라해 봄으로써 앞으로 새로운 방사성의약품 개발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데는 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나로서는 나를 패배로 이끈 화합물을 꼭 만들어서 실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약동력학적인 연구는 저널에 발표된 것과는 다르게 하여 새로운 발견도 있었으므로 '대한핵의학회지'에 발표를 하였고, 당시에는 우리나라 핵의학 분야에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우리 세대부터는 어릴 때 장래 희망이 과학자가 되겠다는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과학자의 수요가 급증하고 과학자에 대한 대우도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어릴 때 장래 희망이 과학자였다. 나는 어떤 원리 규명보다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발명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중학교 고등학교의 입시지옥을 지나며 거의 사라져 갔지만 대학교와 대학원으로 진학하면서 차츰 다시 나타나게 되었고, 서울대학병원 핵의학과에 와서 새로운 신장 영상용 방사성의약품 개발에 몰두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이 원래 어릴 때부터의 희망에 따른 궤도로 들어서게 되었고 더욱 더 핵의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2004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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